번역을 직업으로 삼은지 10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번역은 어렵기만 하다.
물론 간혹 쉬운 번역도 있다. 가장 쉬운 번역은 비교적 평이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제품(특히 소프트웨어) 설명서, 서신, 자기소개서 같은 문서들이다.
어려운 편에 속하는 것은 공학,의학, 과학 논문이다.
그리고 내 경험상 가장 어려운 것은 특허와 건설 쪽 문서이다.
논문은 용어가 어렵더라도 논문 사이트를 보면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고, 문장이 어렵기는 하더라도 완전히 말이 안되는 문장은 드문 편이다.
그런데 건설 쪽 문서는 용어도 어렵고 문장도 말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용어들이 마구 나온다. 이런 용어들은 사전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논문 검색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찾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용어 검색에만 몇 십분을 소비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장도 너무 길거나 말이 안되는 문장이 자주 나오는 편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하고 있는 건설 작업 지첨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무려 한 문장이 8줄에 걸쳐 있으며 단어수는 100단어에 가깝다. 원문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하고, 이런 문장을 똑같이 영어 한 문장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아무리 번역의 도사라고 해도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렇게 긴 문장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미의 단위로 구분해서 3~4 문장 정도로 나눈 다음에 번역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위 문장을 아래와 같이 4개의 문장으로 나눌 수 있다.
1. SHOT BLASTING은 표면 제거, 식각, 청소를 동시에 해내는 기타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건식 공법이다.
2. 바닥 표면의 각종 콘크리트 레이턴스 제거와 개보수시 기존 코팅을 표면 처리하고자할 때, 바닥재의 재질(콘크리트, 에폭시, 우레탄, 페인트, 기타 도막 등)과 오염, 부식, 파손에 따라서 적절한 크기의 연마제로 식각 깊이를 조정하여 고르기와 깊이를 원하는 용도에 맞추어 표면 처리한다.
3.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바닥 마감재와의 접착, 결합을 완전 무결하게 할 수 있다.
4. 또한 내장된 특수 집진기는 불순물과 먼지 등에 대한 청결을 유지하므로, 이 시스템은 공해없는 청소를 한꺼번에 능률적으로 완벽하게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개보수가 뭔지, 도막이나 레이턴스가 뭔지 조사해야 한다. (개보수는 renovation, 도막은 coating, 레이턴스는 laitance) 그런데 이런 단어들은 당연히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단어의 검색에만 십 분 이상이 걸린다. 다행히 이렇게 긴 문장은 건설 문서 중에서도 드문 편이다. 가끔 이런 문장이 나오면 정말 번역하기가 싫어진다.
다음과 같이 짧으면서도 난감한 문장도 있다.
신축줄눈이 뭔지는 차치하더라도, "균열 발생억제와 유도에 효율적이다"라는 부분은 신축줄눈이 균열 발생을 억제하는데도 효율적이고 균열 발생을 유도하는데도 효율적이라는 말인데, 그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문장을 번역할 때는 일단 뒤의 "유도"라는 부분은 빼고 번역한 다음 나중에 고객에게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다. 불합리하거나 말이 안되는 문장을 그대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번역 일이란 이렇게 교과서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할 수가 없는 일이 다반사이다.
번역 교재에서는 이런 부분을 다루지 않는다. 번역 교재에 나오는 예시문은 모두 문법에 맞는 문장과 사전에 나오는 단어들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한글 원문을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경우, 위의 예와 같이 한글 원문에 말이 안되는 문장이 종종 나온다. 그리고 내 경험상 이런 문장이 가장 흔하게 나오는 분야가 건설 분야이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건설 분야의 일은 일이 정말 없을 때가 아니라면 거절하고 있다. 건설 문서를 받아서 골치 아팠던 경험이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용어와 원문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업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건설 문서들이 단가를 높게 쳐주는 것도 아니다.
건설 관련 문서를 좀더 쉽게, 그리고 문법에 맞게 쓰려는 노력이 업계에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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